취업의 문이나 학생들에게 일류대학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 역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를 묻는 사람에게 예수는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있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구원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사람의 상태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았고, 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주님과 가까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주님과 바른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는 그 앞에서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구원에 상관이 없는 사람을 향하여서는 “행악하는 모든 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실 때의 행악이란 윤리 도덕적인 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기 뜻대로 충성한 사람입니다.
2.예수님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이란 주인이 열어주는 문입니다. 한 번 문을 닫은 후에 주인이 열어주기 전에는 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좁은 문이란 폭이 좁은 물리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이 열리는 일에 오직 주인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할 뿐입니다.
주인의 마음이 열려야 열리는 문이 좁은 문입니다. 사람들의 자기 입장과 공로를 가지고 무엇이라고 해도 주인이 열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주인의 마음을 여는 일에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행13:22)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지만 구원 받는 순서는 이방인이 먼저 받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사도 바울은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한다고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을 전제로 하는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 앞에서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았어도 그 관계가 자기 이익의 관계이기에 주인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남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바른 관계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할 때 사람이 자기의 업적을 들어내면서 잘난 체 하면 오히려 그 힘 있는 사람의 마음은 닫치고 맙니다. 겸손과 정직함이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더욱 쉽게 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 자비를 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힘씀이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우상과 관계 맺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들으며, 또 주의 말씀에 대해서 믿음으로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루어집니다. 주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