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2
모든 사람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소망의 대상은 그 사람의 삶의 목표와 방향성이 됩니다. 먼저 소망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이제 소망의 대상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됩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는 ‘믿음의 주’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신뢰의 대상, 믿고 따를 지도자입니다. 사람에게 믿고 따를 지도자, 구원자가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의 침입으로 그들을 구원할 주를 찾았습니다.(삼상11:3) 사울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왕이 되지만 사울도 이스라엘의 믿음의 주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는 ‘온전케 하시는 이’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제자훈련을 받아도 성령 받지 않으면 예수 제자로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육과 혼과 영 전체를 온전하게 하는 일은 오직 예수께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사람을 온전케 하십니다.(요14:16-17)
예수는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이’입니다. 예수는 그의 사역에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원래의 영광을 회복합니다.(빌2:9-10) 영광의 예수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결국은 그것을 함께 누리게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소망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입니다.
2.소망의 대상이신 예수를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는 것은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며 보면 보이는 것에서 교훈이나 위로와 힘 같은 것을 얻습니다. 소망의 사람은 예수를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소망은 묵상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묵상했고(막1:35), 엘리야는 그의 사환에게 바다 쪽을 ‘열심히 바라보라’고 했습니다.(왕상18:43)
바라본다는 것은 직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예수를 선입견을 가지고 보고 멸시합니다.(사53:3)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 역시 그들의 삶의 기준으로 예수를 보았고, 목수의 아들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앙망하는 것입니다. 기대감과 간절함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대감과 간절함이 없이 그냥 대충 눈으로 구경하는 것은 소망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간절하게 예수께 매달렸습니다.(막7:27-28)
3.소망의 대상이신 예수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소망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침입에 대해서 애굽의 도움에 소망을 두었습니다.(사31:1) 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영화 같은 것을 우리의 소망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 혼, 육 전체의 온전함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한 우리의 온전함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축복했습니다.(살전5:23) 인간의 전체적인 면이 온전케 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부분만 구하면 가장 소중한 영혼을 소홀히 하는 것이 됩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결국 주와 함께 살고, 하늘에 앉게 됩니다.(엡2:5-6) 우리가 바라보는 주의 영광의 보좌는 곧 우리가 함께할 자리입니다. 영광의 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도 힘써 견디고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리면 인생의 모든 것을 허비합니다. 믿음의 주, 우리를 온전케 하고, 영광을 주시는 예수를 소망의 대상으로 삼고 바라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