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38
철학에서는 형이상학, 형이하학을 말하지만 그 철학적인 것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세상의 것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세상의 것들을 훨씬 뛰어 넘은 초월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세상의 가치관과 삶은 믿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에서 ‘감당’ 헬라어 ‘악시오스’는 ‘칭찬받을만한’이란 뜻입니다. 영어는 worthy(훌륭한, 존경받을만한)로 번역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외형적 모습, 실력 등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사람에게서 칭찬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요일2:16-17)
‘악시오스’의 또 다른 뜻은 “당연히 보답할만한”의 의미입니다. 세상에서는 보상을 바라고, 남보다 더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세상은 믿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미쳤다고 말했습니다.(행26:23-24) 많은 학문, 정치적 배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미친 것으로 봅니다.
‘악시오스’의 또 다른 뜻은 “~에 비길 수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이 가져다 준 인생의 목표는 선악과를 먹으므로 눈이 밝아져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비길 수 있는 위치, 권위, 능력을 추구합니다. 마귀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루라고 시험합니다.(마4:8-9)
2.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은 세상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을 초월한다. 세상은 믿음의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에서 유리하지만 그 고난과 환난을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고후10:18)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는 사람은 주님께 칭찬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늘의 보상을 바라고 삽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며 세상의 평안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하늘의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세상 왕에게 굴복하지 않았으며, 오바댜는 그들을 숨겼었습니다.(왕상18:13) 이들은 세상의 보상이 아니라 하늘의 보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목표는 하늘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지만 그들은 오직 하늘의 것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비길 수 있는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붓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시29:1-2)
3.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초월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땅의 것에 가치를 두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에게 목숨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눅12:23) 그러나 자기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눅14:26) 십자가로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를 따르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을 초월해야 합니다. 세상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법과 제도를 통해서 선을 이루려고 하고(벧전2:13), 또는 도덕과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철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세상의 평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세상 초월의 방법은 끝없는 자기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마5:39-41)
세상의 목표를 초월해야 합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부귀, 영화, 건강, 육체적 즐거움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시115:1)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인가가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믿음이 세상을 초월한다고 해서 세상과 관계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초월하여 삽니다. 이런 믿음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